애스턴 마틴 DB6 마크2 밴티지 볼란테, 영국 왕실 웨딩카로 활약했다
여러분에게 애스턴 마틴은 어떤 자동차인가요? 스포츠카? 슈퍼카? 본드카? 아마도 많은 키워드들이 떠오를 겁니다. 특히도 애스턴 마틴처럼 설립한 지 111년이 넘은 자동차 회사라면 말이죠. 오늘은 애스턴 마틴을 이해하기 위한 역사를 키워드 중심으로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1913년, 애스턴 힐 그리고 레이싱
애스턴 마틴
자동차의 역사가 시작되던 19세기 초 영국에선 색다른 이색적인 문화가 펼쳐지고 있었습니다. 다름아닌 레이싱이었습니다. 이 가운데 영국 워릭셔주 고든에서는 영국 귀족들이 고급 스포츠카를 몰고 언덕을 빠르게 오르는 일명 ‘힐 클라임(Hill Climb)’ 경주가 개최되곤 했습니다. 이 가운데 단연 독보적인 성적을 내던 라이오넬 마틴과 로버트 뱀포드는 1913년 버킹엄주 애스턴 클린턴 지역에 ‘뱀포드 & 마틴(Bamford & Martin)’이라는 자동차 회사를 설립했습니다.
회사 소유는 뱀포드가 마틴은 주로 레이서로 활약하며 이듬해 1914년에는 애스턴 힐 클라임 대회에서 우승까지 했죠. 하지만 1925년 로버트 뱀포드가 회사를 떠나고 이때부터 바로 ‘애스턴 마틴 모터스’이라는 회사명으로 거듭나게 됩니다. 그리고 애스턴 마틴은 레이싱으로부터 시작한 스스로의 정체성을 ‘스포츠카’로 결정했습니다.
애스턴 마틴
애스턴 마틴의 초기 클래식 모델로 우리가 주목해야 할 차는 다름아닌 ‘클로버리프’로 알려진 XR 1981입니다. 1923년 후반 단 8대만 제작한 레이싱카는 당시 프랑스를 대표하던 부가티와 호각을 다투었던 차였습니다. 4기통 1,486cc 사이드 밸브 엔진이 장착된 이 차는 지금까지도 애스턴 마틴 클래식의 대표 주자로 잘 알려져 있습니다.
1939년, 제 2차 세계대전과 라곤다
애스턴 마틴
애스턴 마틴은 여러 번의 재정적 고비를 넘기며 스포츠카 제조사로서 명성을 쌓아갔지만 제 2차 세계대전의 여파는 피해갈 수 없었습니다. 결국 1939년부터 자동차 생산을 중단하고 항공기 부품 생산으로 공장 전체의 체제를 전환하게 됩니다. 다만 아이러니하게도 애스턴 마틴은 항공기 동체에 대한 이해를 통해 공기역학에 대해 눈을 뜨게 됩니다.
애스턴 마틴
하지만 전후 재정적 상태는 더 어려움을 겪었고 결국 애스턴 마틴은 파산 직전에 다다르게 되었습니다. 그러던 와중에 애스턴 마틴 역사에서 가장 잊을 수 없는 인물이 등장합니다. 바로 ‘데이비드 브라운(David Brown)’이라는 사람입니다. 데이비드 브라운은 당시 트랙터 제조업체로 전후 복구 사업에 참여하면서 상당한 재력을 쌓았던 사람으로 애스턴 마틴의 스포츠카에 대해 가장 애착을 느끼던 사람 중 하나였죠.
그는 곧바로 은행에 애스턴 마틴에 대한 재정 보증을 바탕으로 회사에 대해 투자를 감행합니다. 그리고 애스턴 마틴의 라인업을 확장하기 위해 ‘라곤다’를 인수하게 됩니다. 애스턴 마틴의 ‘DB 시리즈’와 ‘라곤다’가 라인업에 선 시기와 이유는 바로 이 사건을 통해서였습니다.
1960년대, 본드카와 함께 찾아온 황금기
애스턴 마틴
데이비드 브라운은 그가 사랑했던 WO 벤틀리가 작업하던 V6 엔진을 라곤다에 탑재하며 2L 스포츠카 DB1을 선보이기 시작했습니다. 뒤를 이어 1950년 DB2를 410대 판매하며 단숨에 인기 모델로 끌어올렸습니다. 이후 애스턴 마틴 DB시리즈를 꾸준히 성장시키며 1958년 선보인 DB4가 무려 1185대나 판매되며 큰 성공을 거두었습니다.
애스턴 마틴 DB5, 비밀무기를 간직한 본드카로 등장했다
애스턴 마틴은 지금도 영국에서 운행되며 현존하는 클래식 모델로 각광을 받고 있죠. 더불어 DB5는 1934년 제임스 본드의 영화 골드 핑거에 출연하며 큰 각광을 받았습니다. 애스턴 마틴이 영화 007 시리즈의 본드카로 자리 잡은 시기는 바로 이때 부터입니다. 본드카는 애스턴 마틴의 상상력을 무한히 확대하는 좋은 기회였습니다.
영화 007 그리고 애스턴 마틴은 영국을 대표하는 하나의 문화 상품으로 자리잡았고 당시 수많은 식민지를 건설하며 ‘해가지지 않는 나라’로 세계를 호령하던 영국인들에게 큰 자부심으로 자리매김하게 됩니다.
1974년, 애스턴 마틴의 혼란기
애스턴 마틴
애스턴 마틴은 이후 유럽에서 가장 저명한 레이싱인 ‘르망 24’를 비롯해 다양한 모터스포츠 부문에서 당당히 포디움에 오르며 명성을 쌓아가고 있었습니다. 하지만 1974년 세계적인 경기 침체는 결국 이듬해인 1975년 애스턴 마틴의 공장 문을 닫게 만들어 버렸습니다. 그러나 애스턴 마틴이라는 브랜드의 가치를 알아본 여러 회사들은 지속적으로 애스턴 마틴의 지분에 관심이 컸죠. 결국 애스턴 마틴은 몇 달이 지나지 않아 피터 스프래그라는 사업가의 손에 의해 다시 문을 열었고 6개월 후인 1975년 9월 ‘애스턴 마틴 라곤다 리미티드’라는 이름으로 회사명을 바꿨습니다.
애스턴 마틴
2018년 8월 애스턴 마틴이 런던 증권 거래소에 상장되기 전까지 이 이름은 유지되었습니다. 그리고 1987년 포드, 2007년 프로드라이브 회장 데이비드 리처드, 2013년 메르세데스 벤츠는 각각 애스턴 마틴의 소유자로도 등장해 다양한 부문에서 협업하는 역사를 만들기도 했습니다. 포드의 시기 동안 애스턴 마틴은 생산의 효율을 끌어올리는 한편 판매망도 넓힐 수 있었고, 메르세데스-AMG의 V12 엔진으로 발키리와 불칸 등 이른바 하이퍼카 반열에도 애스턴 마틴의 이름을 올릴 수 있었습니다.
2001년 애스턴 마틴 뱅퀴시, 슈퍼카의 기준
애스턴 마틴
2000년대 초반 애스턴 마틴은 울리히 베즈 박사를 회장 겸 최고 경영자로 추대하게 됩니다. BMW에서 Z1 스포츠카 분야와 포르쉐에서 F1과 르망 프로그램을 주도했던 그는 이듬해 애스턴 마틴의 플래그십 V12 뱅퀴시를 선보입니다. 뱅퀴시는 등장과 동시에 전세계 모터팬들의 마음을 휘어잡았습니다. 이 차는 애스턴 마틴의 모든 전통을 고수하면서도 근육질이며 우아했고 절제된 사치스러움을 표현했습니다. 영국 워릭셔의 게이든 공장에서 수작업으로 만들어지는 애스턴 마틴 뱅퀴시는 최첨단 기술과 수공예 그리고 영국의 전통적인 자동차 제작 방식을 담은 하나의 예술 작품으로 인정받았습니다.
애스턴 마틴
애스턴 마틴 뱅퀴시의 등장은 근대 애스턴 마틴 역사에서 중요한 분기점이었습니다. 뱅퀴시의 성공은 스포츠카 브랜드로서 애스턴 마틴이 1960년 철수한 포뮬러 1에 2020년 복귀할 수 있도록 만드는 기반이 되었기 때문입니다. 애스턴 마틴은 컴백 시즌에 곧바로 세르지로 페레즈(Sergio Pérez) 드라이버가 바레인 그랑프리에서 우승을 차지할 정도였죠. 그리고 지금도 포뮬러 1에서 애스턴 마틴의 브리티쉬 그린 리버리는 유지하고 있습니다.
애스턴 마틴 뱅퀴시
애스턴 마틴 뱅퀴시는 2024년 완전히 새로운 모델로 돌아왔습니다. 지난 111년의 역사 속 가장 강력한 플래그십 모델로 말이죠. 새로운 5.2L 트윈 터보 V12 엔진을 탑재한 뱅퀴시는 835마력의 놀라운 출력과 1000Nm의 토크를 발휘하고, 기어 변속 없이도 강력한 가속력과 345km/h의 최고 속도로 슈퍼카 성능의 새로운 기준을 제시합니다. 애스턴 마틴은 가장 영국적인 그리고 가장 세계적인 슈퍼GT로 자리매김했습니다. 지난 111년의 역사 속에 무수히 많은 애스턴 마틴의 모델들이 존재하지만 그 가운데 가장 먼저 주목해야 할 모델은 바로 애스턴 마틴 뱅퀴시입니다.
애스턴 마틴 DBX 707
이제 애스턴마틴은 한국에서 새로운 브리타니아오토(Britannia Auto, 대표: 권혁민)와 손잡고 브랜드 허브 ‘애스턴마틴 수원’으로 둥지를 틀었습니다. 딜러십은 정말 중요한데, 이전보다 더 크고 확고 부동한 도이치오토모빌 그룹의 자회사죠. 애스턴 마틴이 더 큰 날개를 단 셈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