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은 포르쉐 911에 ‘터보’라는 아이덴티티를 새긴 지 50주년이 되는 해입니다. 포르쉐 911 터보는 911 라인업에서 가장 큰 영향력을 가진 모델이 되었고, 오늘의 주인공인 포르쉐 930은 바로 그 시작점이 되는 모델입니다. 그래서 포르쉐 930은 포르쉐라는 브랜드에 있어 가장 뜻깊은 단어 ‘터보’를 이해하는데 반드시 짚어야 할 매우 중요한 차입니다.
포르쉐 930을 알기 위해선 먼저 되짚어야 하는 모델이 있죠. 바로 1969년 제네바 모터쇼에서 처음 선보인 레이싱카 포르쉐 917로부터 시작합니다. 당시 포르쉐로선 레이싱카에 투입하던 917의 터보차저 기술을 양산형 로드카로 반영할 생각이 처음엔 없었다고 합니다. 포르쉐 917은 레이싱카로 65대만 만들었으니까요. 그리고 포르쉐 917은 르망 24시를 비롯해 거의 모든 유럽의 레이스를 휩쓸어 버립니다.
너무 잘했던 탓일까요? 경쟁자들의 노력을 무색하게 만들 정도로 압도적인 레이스를 펼치던 포르쉐 917에 FIA는 애매한 레이스 규정 변경을 의결합니다. 포르쉐에겐 불리해진 상황. 유럽을 휩쓴 포르쉐는 미련 없이 유럽 무대를 떠나기로 합니다. 그리고 당시 가장 큰 자동차 시장인 미국을 주시하며 북미 최고의 레이스인 캔암(CanAm) 챌린지 컵에 초점을 맞췄습니다. 하지만 당시에 터줏대감 격인 쉐보레나 맥라렌 등이 보유한 빅블록 엔진에 경쟁할 정도의 출력은 아니었죠. 이들과 경쟁할 정도의 출력향상이 필요했던 터였습니다. 결국 당대의 엔진 설계자 발렌틴 셰펴와 한스 메츠거, 페르디난트 피에히 박사는 12기통 917엔진에 터보차저 버전을 사용하기로 결정했습니다.
그들은 포르쉐 917에 최대 1,400마력을 내는 터보 엔진을 장착하고 캔암 스파이더와 인터시리즈 스파이더에 보낼 19대의 레이싱카를 만듭니다. 그리고 이 레이싱카들은 다시 한번 북미 레이싱 포디움을 점령해버립니다. 포르쉐는 1972년 시즌에만 무려 9개 레이스에서 6개를 우승하고 이듬해에는 무려 8개 중 6번을 우승해 버렸습니다. 그야말로 압도적인 결과였죠. 훗날 포르쉐 917은 50명의 국제 모터스포츠 전문가가 선정한 ‘역사상 가장 위대한 레이싱카’로 선정될 정도였습니다.
당시 북미의 레이스 엔지니어들 생각엔 터보차저는 터보랙도 심한 데다 동력 전달 제어가 쉽지 않은 특성 때문에 꼬불꼬불한 트랙에서 불리하다고 생각했어요. 경쟁자들을 물리치기 적합하지 않은 기술로 여기게 된 이유였죠. 하지만 포르쉐는 언제나 이런 불가능해 보이는 기술력을 도전적으로 해결하면서 ‘외계인이 만드나?’라는 신비함을 그려냈던 브랜드였죠. 포르쉐 917의 터보차저 기술은 이제 포르쉐 930에 반영됩니다.
1973년 등장해 이듬해 판매를 시작한 포르쉐 930. 참고로 포르쉐 930 1호차는 페리 포르쉐가 사촌 여동생 루이스 피에히에게 1974년 8월 29일 생일 선물로 전달됐습니다. 처음 이 차를 시승한 사람들은 직전의 911(901)을 운전하며 느꼈던 출력의 갈증을 930은 터보차저로 단박에 해결한 점에 주목했습니다. 이전 포르쉐 911 S가 170마력을 내던 반면 새로운 포르쉐 930은 공랭식 2.7L 엔진과 3.0L 엔진으로 각각 250마력과 260마력까지 출력을 상승시켰으니까요. 그렇게 최초의 포르쉐 911 터보가 탄생했습니다. 오직 레이스에서 승리하기 위한 하나의 목표가 도로 위 양산형 스포츠카에도 고스란히 투영된 셈이죠.
이런 노력의 결과가 모였기 때문일까요? 포르쉐 930은 포르쉐가 만들었던 그 어떤 포르쉐보다 빠른 최고속 포르쉐가 됐습니다. 250마력이라는 출력은 지금이야 흔하지만 당시엔 슈퍼카 영역의 출력으로 독일 양산 차 가운데 가장 빠른 차 였습니다.
포르쉐 930은 1973년 선보인 이후 1974년 말 판매하기 시작합니다. ‘가장 빠른 포르쉐911’이라는 가치는 관심을 끌기에 좋았습니다. 덕분에 판매량도 상당한 수준이었습니다. 포르쉐 917이 레이싱 무대에서 보여준 성능 덕분에 포르쉐911(930)은 도로용 레이싱카로 여겨졌습니다. 또 발터 뢰를(Walter Röhrl)처럼 모터스포츠계 전설들 역시 칭찬을 아끼지 않았죠. 그러다 보니 사회 고위층까지 포르쉐 930을 사기 위해 매장을 방문했습니다. 어느새 포르쉐 930을 탄다는 건 사회적 지위를 나타내는 하나의 척도가 됩니다. 특히 트렁크 리드에 작게 달린 ‘turbo’라는 레터링은 소유자에게 엄청난 자부심이 됐죠.
포르쉐 930은 도로용 양산 차로서 엔지니어들이 여러 가지를 개선했지만 그래도 운전하기 만만치 않은 차였습니다. 도로 위 양산형 스포츠카들은 레이싱 무대에서 발견하지 못한 의견들이 나오기 시작했습니다. 레이서가 운전하는 차가 아니었으니까요. 포르쉐는 태생부터 엔진을 뒤로 배치하고 뒷바퀴를 굴리는 차인데, 여기에 터보차저까지 장착했으니 다루기가 더 어려운 차가 되어 버렸습니다. 특히 차의 앞이 운전자가 의도하는 회전 방향보다 더 돌아가는 오버스티어가 문제였습니다. 게다가 터보차저가 작동하기 전과 후가 너무 다른 차라는 볼멘소리도 나왔죠.
포르쉐 930은 뒤쪽에 엔진이 실려 있고 터보차저까지 출력을 울컥 쏟아내는 특징이 있었습니다. 어쩌면 포르쉐 930의 구조적 특성이자 탄생 업보였죠. 그런데 다른 한쪽에서 이런 점들이 아이러니하게도 남자들의 도전정신에 불을 지폈습니다. 돈만 갖고 있으면 누구나 탈 수 있는 차가 아니라 돈도 있어야 하고 배짱과 운전 실력도 있어야 포르쉐 930의 가치를 끌어낼 수 있는, 즉 ‘사나이의 차’로 여겨졌습니다. 이런 분위기는 지금도 남아 있어 큰 인기를 자랑하는 1인칭 액션 RPG 게임 ‘사이버펑크 2077’ 속 록스타 조니 실버 핸드의 차로 1977년식 포르쉐 930을 지정했을 정도였습니다.
세태가 그렇다고 해도 포르쉐에는 또 하나의 숙제가 생긴 셈이죠. 그래서 포르쉐는 다양한 해결책들을 대입했습니다. 우선 뒷바퀴 간격을 넓혔습니다. 초대 포르쉐 930 섀시 구조가 후기형으로 가면서 더 넓은 와이드 바디 타입으로 변한 계기가 됐죠. 뒷바퀴의 트랙션도 넓은 타이어를 장착하고 더 크게 만들어야 할 필요도 생겼습니다. 더불어 서스펜션은 더 단단하게 브레이크는 더 크게 키워야 전체적인 균형을 맞출 수 있었습니다. 그리고 포르쉐 전매특허인 웨일 테일(whale tail)이라는 커다란 리어 윙도 이 당시 설계가 발전하게 되었습니다. 심지어 변속기도 5단에서 4단으로 만들며 터보차저의 강력한 토크를 감당하도록 교체했습니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포르쉐 930은 교통사고 뉴스 지면의 헤드라인을 여러 차례 장식했습니다. 대표적으로 1985년 캐나다 프로 아이스하키 선수 펠레 린드버그(Pelle Lindbergh)가 미국 뉴저지에서 사고로 목숨을 잃게 되었습니다. 스웨덴 출신으로 북미에서도 사랑받은 이 스포츠 선수의 죽음은 큰 반향을 일으키게 되었고 포르쉐 930에 대한 분위기는 이전과 달라졌죠. 포르쉐는 930 이후 각고의 노력으로 이 오버스티어 문제를 ‘어느 정도’ 풀어 냅니다. 우선 사륜구동을 도입하기로 결정했습니다. 뒷타이어를 키우는 등의 하체 개선은 더 신중하고 치밀하게 파고들었습니다. 4천 rpm 전후로 날뛰던 터보랙 역시 개선해 냈습니다. 포르쉐 930 이후 964에 이르러서 성능을 포기하지 않고서도 그 가치를 지켜낼 수 있었습니다.
포르쉐 930이 나오던 시대는 스포츠카에게는 극심한 역경의 시기였습니다. 1973년 10월부터 석유 생산 아랍 국가와 석유 수출국 기구(OPEC) 회원국은 욤 키푸르 전쟁 동안 이스라엘을 지원하는 국가에 대한 석유 수출을 제한하는 금수조치를 부과했습니다. 이 금수조치는 이듬해인 1974년 해제되었지만 이로 인해 연료비는 이전보다 4배나 올랐고 이후 안정화되기까지 무려 10년이나 걸렸습니다. 포르쉐 같은 스포츠카 메이커들에게는 그야말로 고난의 시기였던 것이죠. 포르쉐 930의 시대가 역대 포르쉐 911 모델 기간 중 가장 긴 16년이 된 이유입니다.
역경을 이기고 자신의 가치를 증명해 낸 포르쉐 930은 포르쉐 911 터보 50주년에 더욱더 깊은 의미를 더하는 모델이 됐습니다. 포르쉐 911 터보는 이런 역사적인 가치 위에 서 있는 모델이죠. 포르쉐 911 터보가 가진 역사적인 스토리는 하나의 아이덴티티로 자리 잡았습니다. 조금 더 다가선 포르쉐 911 터보와 포르쉐 930. 다음에 들려드릴 모터플렉스의 이야기도 기대해 주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