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광의 시대를 기억하고 싶은 마음은 누구나 간절합니다. 특히 헤리티지에 죽고 사는 유럽 자동차 메이커들은 특히나 그렇습니다. 포르쉐에게 영광의 시대란 레이싱 트랙에서 압도적인 실력으로 포디움을 독차지하던 때 일 겁니다. 그리고 그런 고난과 영광의 시간을 같이 보낸 동료들은 영원한 기억으로 함께 남지요. 이런 동료 가운데, 포르쉐의 또 다른 영혼이라 불리는 ‘마티니 레이싱 리버리(Martini Racing Livery)’를 소개합니다.
이탈리아 음료 회사인 마티니 & 로씨는 1968년 포르쉐 레이싱 후원자로 나서게 됩니다. 레이싱 팀을 운영하려면 큰 비용이 필요합니다. 그리고 레이싱 팀 후원자들은 트랙에 모인 사람들에게 자신의 브랜드를 알리기 위해 노력하죠. 그런 탓에 레이싱 팀과 후원자들은 떼려야 뗄 수 없는 관계가 됩니다.
마티니 역시 이런 후원자들 가운데 하나였고, 큰 비용을 후원한 만큼 포르쉐의 팀명과 차체를 꾸미는 데칼 즉 ‘레이싱 리버리’를 마티니의 고유 컬러로 치장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그런 탓에 경주용 자동차들은 각기 레이스카마다 독창적이고 상징적인 색상과 후원사들의 스티커를 부착한 채 트랙에 섭니다.
당시 페라리와 포드가 겨루던 르망 24시는 새로운 규정이 생겼는데, 배기량 5L 이하로 최저중량은 800kg. 동시에 생산대수 25대 이상인 차로 제한한다는 것이죠. 포르쉐는 이것이 하나의 기회라고 보고 1968년 7월 포르쉐는 한스 메츠거를 중심으로 ‘917 프로젝트’를 시작했습니다. 이때 수석 엔지니어는 페르디난트 피에히. 2015년에 터진 폭스바겐 배기가스 조작 사건으로 말년에 이미지를 구겼지만, 당시로선 포르쉐의 기술 총괄 책임자였습니다.
피에히 지휘 아래 포르쉐 레이싱팀은 레이싱 부서를 슈투트가르트에서 바이작으로 이전했습니다. 여기서 마그네슘 튜브 프레임으로 감싼 포르쉐 917 섀시를 완성하죠. 철저한 경량화 덕분에 차체를 800kg의 무게로 묶어두면서도 여기에 포르쉐 엔진 마이스터 한스 메츠거가 디자인한 1,100마력 12기통 수평대향형 엔진을 장착했죠. 섀시 번호 917-051부터 053 포르쉐 917 K-71에 두른 마티니 레이싱 리버리는 환상적인 자태를 자랑했습니다.
팀 이름도 곧바로 ‘마티니 레이싱 팀’으로 고쳐 쓰고 곧바로 우승 사냥을 시작합니다. 1970년 르망 24시를 석권하더니 이내 마티니 레이싱 팀은 북미에서 열리는 데이토나 24, 캔-암(Can-Am) 등 각종 레이싱 대회까지 휩쓸어버립니다. 너무나 압도적인 포르쉐 퍼포먼스에 트랙 위 경쟁자들은 한마디로 맥을 못 추는 상황이 되어 버리죠.
마티니 레이싱 팀의 거칠 것 없는 우승에 모터스포츠 역사상 마티니 레이싱 리버리는 가장 상징적인 컬러 구성이 되어 버립니다. 덕분에 마티니 레이싱 리버리는 르망과 포뮬러 원, 랠리 카, 투어링 카 경기에서도 리버리를 선보이는 것은 물론 파워 보트 레이싱에서도 전설적인 존재가 됐습니다.
자동차에 그다지 관심이 없는 사람들조차 마티니는 이탈리아 브랜드의 술로 잘 알려져 있습니다. 특히 마티니 베르무트를 2/3 넣어서 만든 아페리티프 칵테일은 너무도 유명합니다. 심지어 영국 첩보영화인 ‘007’ 시리즈에서도 마티니가 언급됩니다. 시리즈 주인공인 제임스 본드의 매력적인 목소리로 “보드카 마티니, 젓지 말고 흔들어서(Vodka Martini, Shaken, Not Stirred)”라는 주문을 바텐더에게 전하죠.
하지만 자동차 애호가들에게는 마티니는 조금 다른 의미로 다가옵니다. 바로 포르쉐와 함께한 레이싱 히스토리 그리고 그 속에 함께한 승리의 자취들 때문입니다. 포르쉐와 마티니 레이싱 리버리는 완벽한 궁합을 자랑했습니다. 특히 차체 전면부에서 시작한 마티니 레이싱 리버리가 넓게 퍼지며 포르쉐의 리어 펜더를 지나갈 때는 퍼포먼스를 시각화하는 듯하여 많은 모터팬들의 심장을 두근거리게 했죠.
포르쉐 모터스포츠 헤리티지에 마티니 레이싱 리버리는 언제나 등장하는 전통의 메뉴입니다. 영광의 시대를 함께한 탓에 그 절정의 여운이 남아있는 탓이겠지요.
포르쉐와 마티니의 만남은 1968년 독일 호켄하임에서 열린 레이스부터 시작했지만 지금도 여전히 그 관계는 지속하고 있습니다. 2014년 포르쉐가 르망 24시 레이스에 복귀했을 때 레이스카에 마티니 레이싱 리버리는 사용하지 않았지만, 포르쉐 911 S 마티니 레이싱 에디션 모델을 통해 관계를 확인했고, 917의 계보를 잇는 하이브리드 슈퍼카 918을 선보였을 때도 마티니 레이싱 리버리 버전을 내놓았을 정도죠.
마티니는 1980년대부터 포르쉐와의 후원계약이 종료됨에 따라 포르쉐가 아닌 다른 브랜드의 후원사로 나서게 됩니다. 이탈리아의 란치아는 그중 가장 많은 우승 트로피를 마티니에게 안겨 주기도 했습니다. 그리고 F1 윌리엄스 레이싱팀과는 2014년 F1 레이스카 FW36에 마티니 리버리를 적용했습니다.
하얀색 차체를 휘감은 붉은색과 남색 그리고 하늘색 줄무늬는 마티니라는 레터링이 굳이 나타나지 않아도 모터스포츠를 뜻하는 하나의 아이콘이 되었습니다. 그리고 포르쉐와 어울렸을 때 그것은 포디움의 우승으로 연결되곤 했지요.
포르쉐의 모터스포츠 부문의 역사에서 레이싱 리버리는 마티니 레이싱 리버리 이외에도 다수가 있지만, 그중에서도 마티니 레이싱 리버리는 가장 대표적인 스포츠카 레이싱 부문의 헤리티지로 남아있습니다. 스포츠카 브랜드인 포르쉐를 즐기는 또 다른 방법은 이런 레이싱 리버리가 아닌가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