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차를 선보이는 자리엔 늘 스포트라이트를 받는 사람이 따로 있죠. 회사대표나 홍보담당 직원입니다. 그들은 중요한 일을 합니다. 회사의 전략과 판매목표를 이야기하고 경쟁모델과 대비해서 우수한 점을 전달하는 일이죠. 반면 그 자동차를 설계하고 시험주행을 하며 각 부품의 조율을 이뤄낸 엔지니어야 말로 숨은 영웅이라 할 수 있을 겁니다. 포르쉐 역시 이런 인물이 있었죠. 바로 한스 메츠거입니다.
포르쉐가 가장 사랑한 엔지니어
한스 메츠거는 포르쉐에서 40년 넘게 일하며 레이싱카 제작을 진두 지휘했던 엔지니어입니다. 동시에 그는 모터스포츠에서 활약했던 레이싱카에서 기반한 일반 도로용 스포츠카 제작에도 참여해 혁혁한 공을 세우기도 했지요. 그리고 은퇴 후에도 역시 포르쉐를 잊지 못하며 다양한 활동을 펼쳐오다가 향년 90세로 지난 6월 영면했습니다. 오늘은 바로 그에 관한 이야기를 전하고자 합니다.
1929년생인 한스 메츠거는 독일 슈투트가르트 대학에서 공학 학위를 받은 후 곧바로 1957년부터 포르쉐에서 일하기 시작했습니다. 조용하고 분석적인 성격이었던 그는 처음엔 주로 엔진 주요 부품의 기술계산 업무를 담당했습니다. 차분한 성격의 메츠거는 입사 후 캠 형상 계산을 위한 자체 공식을 작성해 캠 생산 공정을 단순화하고 이로 인해 비용절감에 기여하는 공로를 인정받기도 했습니다.
이후 1960년대에 들어서면서 F1에 참전했던 포르쉐 804 엔진과 서스펜션 개발에 참여하면서 본격적인 레이스카 제작에 참여하기 시작합니다. 그는 조용하고 침착한 성격이었지만 엔지니어링 능력이 특출난 탓에 신규 부서에서도 눈에 띄었습니다. 덕분에 한스 메츠거는 당시 페르디난트 피에히의 추천으로 R&D부서를 총괄하는 자리에까지 오르게 되었고, 점차 르망 24에서 포르쉐의 모든 레이스 준비를 전담하는 위치를 차지합니다.
한스 메츠거의 모터스포츠 부문 핵심 커리어 시발점으로 삼을 법한 시기입니다. 동시에 포르쉐가 자랑스럽게 생각하는 모터스포츠 부문의 헤리티지의 씨앗이 파종되었던 셈이죠. 한스 메츠거는 그만큼 1950년대 후반부터 90년대 초를 아우르는 포르쉐 모터스포츠의 중심에 있던 엔지니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가 만든 강력한 레이싱용 수평대향형 엔진은 경쟁자들을 물리쳤고, 이를 바탕으로 만든 도로용 스포츠카 부문에서도 상당한 성과를 일궈냈다고 평가할 수 있죠. 특히 993 이후 공랭식 엔진이 996 수랭식 엔진으로 바뀌던 시절 마스터 엔지니어로서 포르쉐의 자연스러운 진화를 일궈냈습니다.
1969년 포르쉐 917의 충격적인 데뷔
포르쉐 레이싱 엔진 디자이너이자 제작자였던 한스 메츠거가 선보인 레이스카 중 주목할 만한 차는 1969년 데뷔한 포르쉐 917입니다. 당시 페라리와 포드가 겨루던 르망 24시를 중심으로 새로운 규정이 생겼는데, 배기량 5L 이하로 최저중량은 800kg. 동시에 생산대수가 최소 25대 이상인 차로 제한한다는 것이죠.
포르쉐-피에히 가문의 손자이자, 당시 포르쉐 실세 중의 실제였던 페르디난트 피에히(Ferdinand Piech)는 이것을 기회로 봤습니다. 피에히는 거의 혼자서 917 계획을 기획하더니 이사회를 설득시켜 르망 24시를 휘어잡겠다고 선언합니다. 그가 이렇게 당당하고 저돌적일 수 있었던 건 한스 메츠거의 엔지니어링에 대한 확신이 있었기 때문이죠. 그리고 드디어 1968년 7월 포르쉐는 한스 메츠거를 중심으로 ‘917 프로젝트’를 시작했습니다.
엔진설계를 맡은 한스 메츠거, 샤시 설계는 헬무트 프레겔 등 비교적 젊은 포르쉐 엔지니어들로 구성된 프로젝트 팀은 4.9L 엔진을 탑재한 포르쉐 917을 선보였고, 르망 24시와 데이토나 레이스에서 7승을 거두며 당당히 챔피언의 자리에 오릅니다.
당시 메츠거가 만든 포르쉐 917 엔진은 2종류. 12기통과 16기통 엔진인데, 1960년대임을 고려했을 때 아무리 레이싱용 엔진이라고 해도 한스 메츠거가 만든 16기통은 무려 1,580마력을 내는 괴물 같은 엔진이었습니다. 반면 12기통 엔진의 1,100마력은 조금 더 얌전한 모양이었습니다. 파워면에서는 16기통이 압도적으로 우수했지만 경량화, 내구성 그리고 다른 부품과의 조율을 생각했을 때 12기통이 더 신뢰할 수 있다고 판단했습니다. 결국 최종 결정은 12기통 엔진으로 낙점되었죠.
한스 메츠거의 터보 엔진은 그야말로 압도적인 퍼포먼스를 발휘했습니다. 여기엔 또 다른 마법이숨겨져 있었는데 바로 ‘터보차저 부스트 압력조절 장치’입니다. 실제 1973년 캔-암 시리즈에 출전한 917/30에 탑재된 912/52T형 터보 엔진에서는 레이스 중 터보차저 부스트 압력을 제어할 수 있는 웨이스트 게이트 밸브 제어기능이 있었습니다.
이 제어 밸브를 사용하면 드라이버가 수동으로 레이스 도중 터보차저의 부스트 압력을 조절할 수있었죠. 쉽게 말해 부스트 압력을 0.1바 올리면 출력도 정확히 50마력 이상 상승하면서 가속력에 도움을 줬습니다. 한마디로 레이스를 지배할 수 있었죠.
참고로 포르쉐 917이 르망의 쭉 뻗은 도로인 뮬산 스트레이트에서 기록한 388km/h는 지금도 회자하는 전설로 남아있습니다. 이 포르쉐의 5L 엔진은 당시 페라리의 512S에 대항하여 나온 것인데, 너무나 압도적이어서 나중엔 레이스 규정까지 수정해야만 했습니다.
마지막 917로 불리는 917/30은 트윈터보 수평대향엔진을 탑재한 5,374L 엔진인데, 1,100마력으로 820kg 차체를 가차 없이 밀어냈습니다. 1973년 캔-암(Can-Am)시리즈를 전승으로 마무리하며 당당히 은퇴를 알렸죠. 당시 포르쉐가 레이스를 떠난 이유는 경쟁할 상대가 없었기 때문입니다. 포르쉐는 1970년 6월 13일 르망 24시 첫 승을 시작해 최종적으로 포르쉐 917은 3년간 24번의 대회에 참가해 15승이라는 위업을 달성합니다.
한스 메츠거는 모터스포츠의 경쟁적인 상황을 즐기는 사람이었으며, 기본적으로 모터스포츠에 대해 그리고 포르쉐라는 브랜드로 이기는 방법을 정확히 알고 있는 엔지니어였습니다. 이런 경험을 바탕으로 도로용 스포츠카 부문에서도 마니아층을 두텁게 확립할 수 있었습니다.
특히 1996년까지 생산되어 오던 공랭식 포르쉐를 수랭식으로 전환하는 과정에서 그는 모터스포츠 노하우를 아낌없이 쏟아부었습니다. 더불어 수평대향형 엔진의 단점이라고 불리던 점들을 드라이섬프 오일 순환 방식을 채택하면서 해결해 나가기도 했죠. 그의 이름이 붙은 ‘메츠거 엔진’들은 꽤 오랜 시간이 지난 지금도 마니아들에게 엄청나게 추앙받기도 합니다.
특히 포르쉐의 양산형 스포츠카 가운데 메츠거 엔진의 완성형이라고 불리는 포르쉐 997 GT3 RS 4.0은 전 세계에서 사랑받는 한스 메츠거의 역작 중 역작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한스 메츠거는 90년대 중반 포르쉐에서 은퇴했지만 2011년까지도 왕성하게 활동하며 엔지니어로서 영향력을 가포르쉐가 만드는 21세기 클래식 포르쉐인 싱어 포르쉐의 제작에도 참여하는 등 왕성한 활동력을 보여줬죠.
그러던 그가 지난 2020년 6월 영면했습니다.
그의 사망소식은 전 세계 포르쉐 모터팬들에게 안타까움을 자아냈지요. 폴프강 뒤르하이머 전 포르쉐 최고 개발 책임자는 “한스 메츠거는 브랜드 역사상 가장 중요한 엔지니어 중 하나입니다. 그가 디자인한 엔진으로 우리는 승리했고, 포르쉐가 스포츠카라는 동의어는 그에 의해 만들어진 것이다”라고 애도했습니다.
브랜드 가치는 오랜 시간을 두고 스포츠카 브랜드로서의 포르쉐는 이처럼 과거 위대한 엔지니어들의 희생정신과 모터스포츠 부문에서의 빛나는 성과들이 만들어낸 셈입니다. 그리고 그 한가운데 우리가 기억해야 할 한스 메츠거라는 이름이 있습니다.